-이현주 부관장 "지역 사회 연구 중요한 자료임에도 부산 유물 경매서 다른 곳으로 낙찰"
-봉래수창록, 국립민속박물관에...‘동래부순절도’와 ‘부산진순절도’ 충렬사서 육군박물관으로
-'봉래수창록' 동래부 시화 모임 기록한 서화첩...참여인사들, 직업과 나이를 뛰어넘어
-시와 그림이 함께 있는 '봉래수창록', 부산 지역 사료적 가치로 상당해...향후 연구도 무궁무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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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 연 : 이현주 범어사 성보박물관 부관장(부산.경남 문화재위원)
● 진 행 : 박찬민 BBS 기자

 

매주 목요일 부산시와 경남도 문화재위원이신 금정총림 범어사 성보박물관 이현주 부관장과 함께하는 시간입니다. 최근 발간된 ‘완상, 옛 그림 속 부산을 거닐다’를 중심으로 부산의 이야기를 풀어가는 시간인데요. 지금부터 만나보겠습니다. 이현주 부관장님 안녕하십니까?(네 안녕하십니까)

 

지난 시간에 봉래수창록이 어떤 문화재고 누가 기록했는지 이야기를 나누다가 저희들이 마쳤습니다. 그래서 계속해서 이어가겠는데요. ‘봉래수창록’ 이현주 부관장님께서는 어떻게 바라보고 계시는지 이야기를 나눠봤으면 좋겠습니다. 봉래수창록을 분석하시면서 혹시 놀랍게 생각하신 그런 부분도 있었습니까? 어떻습니까?

조선시대 동래부에서의 시화 모임을 기록한 서화첩은 지금까지 알려진 것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 봉래수창록은 아주 특별한 것이라고 할 수 있고요. 또한 참여 인사들이 직업과 나이를 뛰어넘고 있습니다.

 

그런가요?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이 모임은 1725년 을사년 조석명 동래부사가 주도했죠. 그리고 일본 사절을 접대하기 위해서 서울에서 파견된 접위관 직책을 가진 홍성, 이 접위관이라는 것은 요즘의 외교관이에요. 그래서 접위관 홍성과 그리고 1748년에 조선통신사 사행 때 제술관이었던 정석유라는 인물이 합류합니다.

제술관이라는 건 지금으로 본다면 부산시장이 외국으로 외교 활동을 떠날 때 동행하는 사람들 중에 글을 잘 쓰는 인물이에요. 그래서 외교관 그리고 제술관, 동래부사 그리고 무엇보다 흥미로운 인물은 범어사 승녀로 기록된 존각이란 사람입니다. 그래서 아직까지 이 범어사 승녀 존각이라는 인물의 이력은 확인할 수 없지만 아마 이 동래부사와 함께 시화를 할 정도라고 하면 문장의 소양을 갖춘 범어사 방장이나 주지스님 정도의 위치에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래서 동래부청의 문무관들과 범어사 스님과의 교류를 짐작해 볼 수 있어서 흥미로웠습니다.

또 두 번째는 이제 나이도 뛰어넘고 있습니다. 당시 동래 부사 조석명이 51세 그리고 접위관 홍성이 23세, 그리고 정석유가 37세였습니다. 이것은 마치 추사 김정희가 25살 때 70대에 청대의 옹방강이라는 학자와 학문적 교류를 나눈 것과 비교할 수 있습니다.

 

세대를 뛰어넘어서 하나의 어떤 공감대로 교류를 하는 거 조선시대에 이랬다고 하는 부분이 굉장히 놀랍네요.

그런데 한번 생각을 해보시면 모임을 하고 싶다고 당장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시문의 소양을 갖춘 친구들이 하고자 하는 그 시간대에 동래부에 함께 있어야 하죠. 일부러 서울에서 경기도에서 이렇게 친구들을 부를 수는 없으니까요. 그래서 이 서화첩에는 이 모임을 하게 된 계기를 적어두고 있습니다.

 

계기가 무엇이었습니까?

첫 번째 계기는 동래부사 조석명이 동래부사를 그만두고 나서 동래부사 시절의 기간을 회상하기 위해서 만들었다고 적혀져 있는데요. 이걸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하게 된 것은 동래부사로 부임을 한 이후에 조석명이 경상도 일대에 문장의 거장을 수소문합니다. 친구들을 함께 시화를 나눌 사람들이 있어야 되니까요.

그런데 누군가가 봉산의 정석유 그러니까 봉래산의 정석유가 고금의 학식을 갖췄다고 알려주죠. 그런데 정석유가 마침 동네에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기다려야 되죠. 그래서 당시에 함양군수로 타지 근무를 하고 있었는데 며칠 지나서 마침 정석유가 볼 일이 있어서 동래부에 들리게 됩니다. 그러자 정석유가 들리게 되자 동래부사가 너무 반가워서 버선발로 뛰어나가서 그를 맞이했다...이 단어가 그 시문집에 적혀져 있습니다.

 

버선발로 뛰어나가서...

버선발로 뛰어나와서 그를 반갑게 맞이해서 드디어 이제 시문창화를 함께 열 수가 있게 되었다라고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완상적 취향과 소양을 갖춘 인물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시간을 마련해서 술잔을 기울이면서 동레의 아름다운 풍광을 나누기 시작한 거죠.

 

23세에 홍성이라는 인물은 어떤 이야기들을 많이 했을까요? 정말 이 당시에 25살 정도의 차이가 난다는 것은 지금보다는 더 많은 거리감을 느낄 것 같은데...

지금 홍성이 23세면 대학교 2학년 군대 갔다온 대학교 2학년의 학생이 51세에 지금 시장님이 독대를 해서 외교관들과 시문을 나눈다고 하는 것은 그만큼 조선시대에는 과거 시험을 준비하면서 어린 나이에서부터 늘 공부를 문장을 공부했다라는 조선시대 유교사회의 모습을 알 수가 있습니다.

 

홍성이라는 인물은 지금 따지면은 천재에 가까운 인물이네요.

그렇다고 볼 수 있죠.

 

그런 분들이 모여서 그 당시에 시를 읽고 그림도 그리고...이런 기록들이 남아 있다는 것도 참 신기하고 그래서 봉래수창록이라는 이 문화재가 더 가치가 있다고 생각이 드는데...그러면 봉래수창록은 어떤 점에서 지역민들에게 좀 더 가치가 있다고 보시는지 부원장님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봉래수창록 안에는 시와 그림이 함께 들어 있습니다. 시는 조석명, 홍성, 정석유 등이 금정산 다대포, 충렬사, 또 초량왜관, 영가대, 범어사 등지에 부산의 역사적인 명소이자 아름다운 풍광을 시로 읽고 있습니다.

그런 반면에 그림은 회화식 지도인데요. 내부에 회화식 지도를 마치 산수화처럼 그린 그림입니다. 그런데 무엇을 그렸냐 하면 아름다운 풍광을 그린 것이 아니라 동래부의 관아 시설을 정확하게 묘사를 하고 있어요.

 

관아 시설이라는 거는 지금의 공공기관들을 말씀하시는 거죠?

그렇죠. 일종의 부산시청을 그리면서 부산시청에 여기는 본관 옆에는 뭐 그 당시에는 별관, 어디는 이제 이전 향교에서 교육시설, 교육실 이렇게 이 관아 시설들을 정확하게 그림을 건물들을 그리고 그 옆에 건물들의 이름을 이렇게 기록을 했습니다.

그러면 시가 낭만적인 풍경을 심상적으로 표현을 했다고 하면 그림은 지형적 사실을 정확하게 전달하는 기록화 성격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점은 동래부를 다스리는 동래부사가 완상적 취향뿐만 아니라 자신의 직업의식을 반영한 거죠.

 

대단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모임이 이제 동래부사가 주도를 하고 시는 참석자들이 지었는데 그러면 그림은 누가 그렸을까요? 궁금하실 겁니다. 동래부사가 직접 그렸을 리는 없고요.

 

그 정도면은 진짜 대단하신 동래부사이신데...

도화서 화원을 서울에서 갑자기 부르기에도 거리가 너무 멉니다. 그래서 바로 동래부에서 활동하던 지역 화가에게 요청을 해서 그림을 그리게 됩니다. 그래서 화가의 이름은 기록되어 있지 않아서 그 누구인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이미 우리 부산 동래관아에는 무관직을 겸임하면서 일종의 무임직이니까 동래 관청을 수요하는 경찰관, 군인 이런 직책을 가진 인물들이 그림을 함께 그렸습니다. 지도를 그려야 되니까. 그래서 그 인물들 중에 한 명이 동래부사의 명을 받아서 그림을 표현을 하게 되죠. 그래서 부산 지역의 사료적인 가치로서 상당히 또 그리고 앞으로 또 연구할 가치가 무궁무진하다고 생각을 합니다.

 

이현주 부관장님께서 봉래수창록 관련한 숙제가 더 남아 있다라고 저희들 생각을 하면 될 것 같네요.

네 맞습니다.

 

이 그림을 누가 그렸는지 또 밝혀지면 또 더 많은 이야기들이 그 부분을 통해서도 또 이어지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어서 그 당시 부산의 모습을 좀 더 그려볼 수 있지 않을까라는 그런 생각도 듭니다. 이밖에 부관장님 봉래수창록 관련해서 추가적으로 우리 청취자 여러분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까?

아쉬운 것은 봉래수창록이 지역사회 연구에도 중요한 자료임에도 불구하고 현재 부산에서 작품을 관람할 수 없습니다. 국립민속박물관에 소장이 되어 있죠. 아마 잘 아실 거예요. 그 동래 지역의 임진왜란의 대표적인 다른 기록화 작품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습니까?

네, 동래부의 무인이 너무나 잘 알려져 있는 변박이 그린 ‘동래부순절도’와 ‘부산진순절도’라는 작품은 부산 충렬사의 보관되어 있다가 1970년대에 육군박물관으로 옮겨갑니다.

그리고 또 다른 동래부의 무인이 그렸던 변곤이 그린 ‘동래부순절도’는 경매에 한 번 출품되었었는데 부산박물관에 낙찰을 못 받고 울산박물관에 낙찰이 됩니다.

그래서 그것도 울산 지역에 소장되어 있고 부산에는 모사품만 관람할 수 있습니다. 가끔씩 제가 부산지역 박물관의 유물 구입 심의에 참여하는데 예산이 부족해서 부산과 관련한 중요한 유물을 구입하지는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그래서 부산박물관의 유물 구입 예산이 좀 더 증가되어서 부산 지역과 꼭 관련돼 있는 중요한 유물들은 우리 지역에서 소장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됐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봉래수창록도 경매에서 국립민속박물관이 낙찰받아서 갔다고 지난 시간에 저희가 설명을 드렸는데...부산의 주요 문화재들이 이렇게 안타깝게 경매에서 다른 곳으로 이렇게 낙찰받아 갔다는 것도 좀 가슴이 아픈 것 같아요.

예산은 한정되어 있고 또 이제 예산이 많은 공공기관 박물관에서 좀 더 높은 가격에 이건 경매는 입찰이니까요. 어쩔 수 없이 한계점에 오르면 저희 부산지역 박물관들은 포기를 해야 하니까 안타까운 면이 있습니다.

 

저희들이 이렇게 부산 지역 문화재를 소개해 드리면서 이런 점에 초점을 맞추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우리 소중한 문화재를 가져오고 지키고 우리 지역민들에게 보여드릴 수 있는 그런 많은 기회가 있었으면 하는 그런 바람도 꼭 전하고 싶으니까요. 이런 바람이 좀 전해졌으면 좋겠습니다. 그렇죠?

네네

 

봉래수창록 설명을 하시면서 이 동사수창록도 설명을 하셨어요. 그래서 동사수창록에는 바로 조선통신사 이야기가 있어서 조선통신사 이야기로 바로 옮겨가고 싶지만...그 내용이 너무 방대하기 때문에 저희가 우선은 ‘농가월령도 12곡병’에 대해서 알아보고 넘어가는 시간을 갖도록 할텐데... 부관장님 벌써 시간이 끝났습니다. 저도 너무 재미있게 들었고 문화재 관련의 뒷이야기들 그리고 부관장님의 해설까지 들어가니까 시간 가는 줄 모르겠네요. 아쉽게도 ‘농가월령도 12곡병’은 저희가 다음 시간에 말씀 나눠보도록 하고요. 이번 주 말씀은 여기서 정리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지금까지 금정총림 범어사 성보박물관 이현주 부관장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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