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구백자박물관 정두섭 관장의 이야기 속으로

■ 프로그램 : 춘천 BBS ‘아침세상 강원’  

   (춘천 100.1, 강릉 104.3, 속초 93.5, 양양 97.1MHz)

■ 방송일시 : 2024년 9월 4일(수) 오전 8시 30분 

■ 출연 : 정두섭 양구백자박물관장  

■ 진행 : 이석종 기자

정두섭 양구백자박물관장/개인 SNS 갈무리
정두섭 양구백자박물관장/개인 SNS 갈무리

■ 이석종 기자 : 양구는 조선 백자의 시원지로 알려져 있습니다.  양구군은 양구 지역의 백자 제작 역사를 보존하고, 조선왕실 백자의 중심 원료였던 양구백토의 연구와 현대적 활용 가치를 모색하기 위해 방산면에 백자박물관을 개관했는데요.

아침세상강원에서는 양구가 어떻게 조선 백자의 시원지가 됐고, 또 이후의 변천 과정과 앞으로의 과제 등에 대해서 연속해서 알아보는 시간 마련했습니다.

도움 말씀에 양구백자박물관 정두섭 관장님이십니다. 정두섭 관장님 안녕하세요?

■ 정두섭 관장 : 네 안녕하세요.

■ 이석종 기자 : 네 만나 뵙게 돼서 반갑습니다.  관장님 먼저 자기소개부터 좀 간단히 좀 해 주시겠습니까?

■ 정두섭 관장 : 저는 이 지역에서 나고 자랐고요.  그리고 대학에서 도예를 전공했고, 2006년도에 저희 박물관을 개관할 당시에 임용이돼서, 올해 이제 19년째 일을 하고 있는 정두섭 이라고 합니다.

■ 이석종 기자 : 그러니까 2006년에 양구 백자박물관이 개관을 한 거네요. 그러니까, 알겠습니다. 그러면 이제 관장님께서는요. 도자기에 대해서 언제부터 관심을 가지셨고 또 도자를 연구하신 지는 얼마나 되셨습니까?

■ 정두섭 관장 : 도예를 배우기 시작한 거는 이제 91년도에 대학에 입학하면서부터 이제 시작을 했고요. 그리고 그 이후에 대학을 졸업하고 석사 과정도 도예로 전공을 하였고, 그리고 2006년도 박물관에 들어올 당시에 이제 사학과에 진학을 해서 양구 지역의 도자사를 연구하기 시작했어요..

■ 이석종 기자 : 그래요? 그러니까 양구 지역의 백자를 더 연구하시기 위해서 대학에서는 도자 쪽을, 이제 직접 만드는 쪽 이쪽을 하셨고, 이제 대학을 졸업하고 이후에는 도자사를 연구하기 위해서 사학과를 또 대학원을 가신 거예요? 대단하시네요.

■ 정두섭 관장 : 아무래도 이제 도자기를 만드는 사람들은 도자기를 만드는 것에 대한 이론은 어느 정도 쌓여 있을지 몰라도 도자기에 대한 역사들은 사실 좀 많이 이제 취약한 것들이 사실이거든요.  그리고 더더군다나 이제 제가 일을 해야 되는 곳이 이제 박물관이니까 어떤 그런 역사적인 그런 소양들도 충분하게 이제 갖추지 못하면 이제 운영에 이제 어려움이 있겠다라는 생각이 들어서 박사 과정은 사학과에 진학을 해서 양군 지역의 백자를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 이석종 기자 : 그렇게 되신 거군요. 예 알겠습니다. 그러면 이제 양구가요 조선 백자의 시원지라는 것은, 이제 관장님께서는 언제부터 알게 되신 겁니까? 

■ 정두섭 관장 : 구체적으로 이제 표현을 또는 말씀을 드리기는 좀 애매한 것 같긴 한데요. 이게

■ 이석종 기자 : 우연하게 접할 수 있는 계기가 있거나 기회가 있을 것 같은데 아닌가요?

■ 정두섭 관장 : 그거보다는 이제 이런 거예요. 역사라는 거는 시간이 지난 다음에 어떤 사람이 어떻게 읽어내느냐에 따라서 많이 달라질 수가 있잖아요.

■ 이석종 기자 : 그렇죠. 보는 관점에 따라서...

■ 정두섭 관장 : 그런데 이제 연구를 하다 보니 이성계라는 사람이 조선을 건국하기 위해서 왕이 되기 1년 전인 1391년에 양구에서 양구백토를 이용해서 도자기를 빚고, 그 도자기에 왕이 되고자 하는 소원을 빌어놓고, 그리고 그것을 불에 구워서 금강산 월출봉에 이제 묻어두었더라고요. 그리고 시간이 지나고 나서 1932년에 강원도청에서 이제 금강산에 방화선 공사를 하다가 우연히 이제 묻어두었던 백자를 발견을 하게 됩니다. 근데 발견된 백자를 살펴보니 이제 제작된 연도 그리고 이성계 이성계를 따르던 추종자들 그리고 그 자기를 직접 제작했던 양구 방산사기장 신용이라는 명문들이 새겨져 있었던 거죠. 

그래서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하고 직접적인 연결고리가 만들어져 있는 거고 그리고 그 자기를 제작했던 곳이 양구 방산임을 구체적으로 확인을 할 수 있는 거죠.  그렇기 때문에 이제 그것하고 그 뒤에 이제 또 여러 가지 도자 사회에 대한 어떤 정황들을 이제 살펴봤을 때, 조선의 백자가 시작이 된 곳이 양구다 라고 얘기를 해도 무방하겠다라는 생각에서, 이제 그런 문장들을 제가 만들어서 지역 홍보에 사용을 하고 있습니다.

■ 이석종 기자 : 예예 알겠습니다. 지금 이제 이성계 발원 백자, 예전에 제가 드라마를 봤을 때 제 기억에는요. 당초에 이제 이성계 같은 경우에는 왕의 자리에는 별로 뜻이 없었는데 주변에 있던 정도전이라든가 이런 사람들이 강력하게 권해서 왕위에 오른 걸로 제가 알고 있는데 드라마상으로는요. 역사적으로는 제가 잘 모르겠고, 근데 이성계 발원 백자가 발견이 되면서 이분은 왕위에 뜻이 있었던 거네요. 뜻이 없던게 아니고... 

■ 정두섭 관장 : 정도전이나 이런 사람들하고 의견들이 이제 다 조율들이 됐었겠죠. 그러면서 이제 왕이 되고자 하는 어떤 그런 그리고 사실은 조선이 건국이 되고 나서 어떤 불교적인 것들은 많이 이제 이렇게 억압을 하긴 했지만, 실제로는 엄청나게 불교에 심취해 있던 사람이었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어쨌든 그런 발원 백자를 이제 만들게 된 거고, 또 재밌는 거는 지금 정도전을 말씀하셨지만, 사실 저희 중간 시조가 정도전 할아버지입니다.

양구 방산면 입구에 설치된 조선백자 시원지 조형물/자료사진=춘천BBS
양구 방산면 입구에 설치된 조선백자 시원지 조형물/자료사진=춘천BBS

■ 이석종 기자 : 그러세요?  관장님이 정씨 시네요...  그렇구나.. 그러니까 이성계 발원 백자가 발견이 되면서, 이분이 왕위에 뜻이 있었다는 게 확실해졌네요. 역사적으로는... 예 알겠습니다.  그러면 이제 어떻게 해서 이제 양구가 조선 백제의 시원지가 됐는지 좀 지금부터 본격적으로 여쭈려고 하는데요. 제가 이제 조금 전에 차를 타고 양구 백자박물관으로 들어오면서 입구에 보니까, 조선 백자의 시원지라는 조형물이 이렇게 우뚝 서 있더라고요? 근데 보통 이제 도자기 하면은 여주나 이천을 떠올리는 게 요즘 사람들이고, 저도 그렇게 생각을 해봤는데 그러면은 양구가 어떻게 해서 이제 조선 백자의 시원지가 됐는지, 이게 조선 이성계 발원 백자가 발견이 되면서 이렇게 추정할 수 있는 겁니까? 어떻습니까?

■ 정두섭 관장 : 이성계 발원 백자 하나만을 가지고 조선 백자의 시원이 양구라고 얘기를 하기에는 좀 어려움이 있겠죠.  그런데 이제 조선이 건국이 되고 나서 1467년에 경기도 광주에 사홍원 그러니까 임금의 밥상을 책임지던 사홍원에서 사용하던 자기를 구워내던 분원을 경기도 광주에 설치하게 됩니다.  근데 그 분원이 설치되기 이전에는 전국에 있는 도자기를 잘 제작하는 지역에서 도자기를 제작을 해서 공납을 받아서 사용을 합니다. 분원이 설치되기 이전에는... 그런데 그 당시에 공납되었던 거의 모든 도자기들은 백자로 제작을 해서 공납을 하는 것이 아니라 분청 사기로 제작을 해서 공납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제 양구 지역에서는 일찌감치 백자로 제작을 해서 그 중앙관청에 공납을 하게 된 거죠. 그래서 양구 지역의 가마터에서 이제 발견된 관사의 이름이 새겨져 있는 백자편들을 살펴보면 이제 공안부, 정종이 상왕이 되었을 때 그 상왕부가 이제 공안부라는 관청인데 공안부에서 사용했던 그릇, 장흥부에서 사용했던 그릇, 사선서에서 사용했던 그릇, 그 다음에 예빈시에서 사용했던 그릇, 이렇게 중앙 중요 관청에서 사용했던 그릇들을 만들었던 흔적들이 이제 보이게 되는 거죠.  글자로 제작을 해서.. 그래서 다른 지역에서는 분청으로 제작을 해서 공납을 했는데 양구 지역에서는 백자로 제작을 해서 공납을 하는 거예요.

■ 이석종 기자 : 깨끗한 백자...

■ 정두섭 관장 : 아 그렇게 생각하시면 안 돼요. 여말 선초 백자들은 이성계 발원 백자도 그렇게 깨끗한 백자는 아닙니다. 

■ 이석종 기자 :  유약을 발라서 이렇게 하얗지 않습니까? 백자는...

■ 정두섭 관장 : 그 시기에는 이제 그렇지는 않고요. 유약의 색도 청잣빛이 강하고 그리고 흙도 이렇게 깨끗한 백자를 만들기 위해서 정제가 되었다기보다는 이 단순하게 분쇄만을 해서 거친 그런 백자예요. 그 시기의 백자들은... 그리고 또 세종대왕이 1397년생이에요. 예 그런데 세종대왕의 태항아리도 양구 지역에서 제작이 되었을 가능성이 크고 그리고 그것에 대한 큰 이견이 아직은 학자들 사이에서 없어요. 그래서 이성계 발원 백자 그 다음에 여말선초의 공납 백자, 그 다음에 세종대왕의 태항아리 등을 통해서 조선의 백자가 시작이 된 곳이 양구다라고 결론을 내릴 수 있는 그런 근거가 마련이 되는 거죠.

■ 이석종 기자 : 그렇게 되는 거군요. 예 알겠습니다. 그리고 아까 잠깐 말씀을 해 주셨는데, 이성계 발언 백자가 이제 금강산 그쪽에서 1932년에 발견이 됐다고 말씀을 해 주셨는데, 그게 어떻게 발견이 되게 됐는지 그 스토리를 좀 더 말씀해 주실 수 있을까요?

■ 정두섭 관장 : 그러니까 제가 확인한 바로는, 이제 방화선 공사 강원도청에 있는 사람들이 했는지 강원도청에서 발주한 공사인지는 모르겠으나, 방화선 그러니까 산의 허리를 깊게 파는 거예요. 불이 나게 되면 보통 아래에서 위로 번지게 되죠.  근데 끊어놓으면 불이 이제 쉽게 번지지 못하는 거죠. 그래서 그런 공사를 이제 방화선 공사라고 이제 얘기를 하더라고요.  근데 그 방화선 공사를 하던 중에 이제 우연히 석함을 발견하게 되고, 그 석함 안에 이제 그 발원 백자들이 이제 들어 있었던 거죠.

■ 이석종 기자 : 그렇군요.  거기에 이제 이성계 전 장군이 내가 왕이 되게 해달라 이렇게 발원을 한 거고요. 예 알겠습니다. 이제 이성계 발원 백자 같은 경우에는 그러면요. 지금 백자박물관이 양구에 세워져 있지 않습니까? 이게...(조선백자의) 시원지이기도 하고, 그러면 이성계 발원 백자는 지금 양구 백자박물관에 보관 중입니까? 아니면 다른 곳에 보관 중입니까?

■ 정두섭 관장 : 안타깝게도 이제 국립중앙박물관에 지금 소장이 되어 있고요. 국립중앙박물관 그리고 얼마 전에 아마 좀 됐을 거예요. 2017년 18년 정도에 우리나라 보물 1925호로 지정이 되어 있는 상황이고요. 그리고 이성계하고 그러니까 조선의 개국하고 이제 상당히 밀접한 보물이다 보니 상당히 인기가 있는 보물이에요. 그 보물 자체가 그래서 중앙박물관에 지금 이제 소장이 되어 있습니다.

■ 이석종 기자 : 양구백자박물관으로 올 가능성은 없을까요?

■ 정두섭 관장 : 저는 무조건 가져와야 된다고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인데.. 저도 꼭 이성계 발원 백자가 양구로 와서 지역에 있는 어떤 백자 문화에 대한 어떤 융성함이 다시 이성계 발원 백자로 인해서 그 보물로 인해서 다시 좀 활성화가 됐으면 하는 큰 바램을 가지고 있습니다.

■ 이석종 기자 : 예 알겠습니다. 이제 양구에서 백자가 이제 생산되기 시작한 게 고려 말에서 조선 초기라고 이렇게 알려져 있는데요. 그러면 이제 양구에서 백자가 생산되게 된 계기가 있을 것 같은데, 양구에서 백자가 생산되게 된 계기가 어떤 게 있습니까?

■ 정두섭 관장 : 문헌이나 이런 거는 거의 찾아볼래야 찾아볼 수 없겠죠... 더더군다나 양구의 경우에는...  다만 이제 세종실록지리지를 살펴보면 자기소가 2개가 있고 도기소가 하나 있다. 자기소는 중급이고 도기소는 하급이다... 이렇게 이제 되어 있어요.  그래서 그걸로 살펴봤을 때 어찌 됐든 그 당시에 이 지역의 소, 자기소와 도기소 도기와 자기를 구워내던 소가 존재했다라는 것을 이제 확인할 수 있고, 그렇다라면 고려 말 조선 초 세종실록지리지가 편찬되기 그 이전에, 그러면 최초의 양구의 백자들은 어떻게 제작이 되었을까?... 제가 보는 견해로는 이런 거예요. 양구에서는 청자를 만들던 흔적이나 여러 가지 보면 고려시대에는 청자고 고려말 조선초는 분청사기고 그다음에 그 이후에는 이제 백자가 만들어지게 되잖아요. 근데 양구에서는 청자를 제작하던 흔적이나 분청사기를 만들던 흔적들은 보이지 않거든요.. 거의 바로 백자가 만들어지는 그런 형태인데 도자기는 어느 날 아침에 누군가가 가서 탁 만들고 싶다고 해서 만들 수 있는 게 아니죠.  그래서 저는 양구백자의 시원을 어떻게 보냐면 우리나라 도자사를 살펴봤을 때 청자가 주로 제작이 되던 곳은 이제 강진하고 부안 일대죠. 근데 이제 늦게까지 이제 한 1350년경까지만 해도 전라남도 강진 일대에서 공납 청자들을 주로 제작을 해요. 근데 이 공납 청자들을 제작을 하는데 왜구들이 자주 이제 쳐들어와서 죽이고 때리고 뺏어가고 이런 것들을 반복을 해요. 그리고 또 하나는 이제 이게 공납 청자임에도 불구하고 이제 사적인 힘 있는 사람들의 어떤 사적인 수요들이 늘어나요. 그래서 어떤 이런 사회적인 현상 물리적인 현상들 때문에 이 해안 강진 일대의 해안가에 있던 이 청자를 만들던 자기 소가 이게 이제 해체가 됩니다.                     

해체가 돼서 그냥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여기에 있던 사기장들이 내륙으로 이렇게 들어가요.

■ 이석종 기자 : 전국으로 흩어지는군요?

■ 정두섭 관장 : 전국으로 쭉쭉쭉쭉 들어가서 그곳에서 도자기를 만들 수 있는 원료를 찾고, 그 원료를 이용해서 도자기를 만들게 되는 거죠. 그러면서 청자가 조질화가 되면서 분청이 되는 거고 그렇죠? 분청에서 하얀 거를 바르다 바르다 바르다 덤벙 하면서 백자가 만들어지고 이런 거죠. 그런데 이제 거기에서 그렇게 이제 내륙으로 들어오던 사기장들 중에 일부가 양구에 와서 청자를 제작하려고 보니 청자를 제작하기 위한 원료보다 백토가 있는 거죠. 근데 이 청자를 만들던 사람들은 백자를 안 만들었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을 하시는 경우가 많은데...

■ 이석종 기자 : 저도 그럴 것 같은데요...

■ 정두섭 관장 : 근데 이 사람들도 백토를 알아요. 그리고 백토를 이용해서 실제로 자기를 빚기도 하고, 근데 이제 청자 중심의 그릇을 빚는 거죠. 그러니까 이 사람들은 청자의 제작 기술력을 가지고 백토를 선택해서 만들기 시작하니까 그것이 이제 양구백자의 시작이 되지 않았을까 이렇게 추정을 하고 있습니다.

■ 이석종 기자 : 어쨌든 그때 당시에 이제 어쨌든 강진이나 부안 쪽에 계시던 도공들이 내륙으로 퍼지면서 이제 양구까지 들어온 건데, 양구에 어떤 분이 들어왔는지는, 기록상에는 전혀 없을 테고, 그렇게 해서 이제 양구에서 백자가 생산되기 시작했다....

■ 정두섭 관장 : 예 그렇게 추정을 하고 있습니다. 

■ 이석종 기자 : 이제 양구에서 생산된 백자가 중앙관청에 납품이 되는 공납자기가 됐다는 건, 그 만큼 품질이 굉장히 좋았던 것일 텐데요. 그렇다면 이제 백자의 재료인 백토의 품질도 아주 좋았어야 할 것 같은데, 양구백토의 품질은 당시에 어땠을까요?

조선백자의 미를 보여주는 달항아리/사진제공=국립춘천박물관
조선백자의 미를 보여주는 달항아리/사진제공=국립춘천박물관

■ 정두섭 관장 : 연말선초, 중기, 후기로 좀 가려져야 될 것 같긴 한데요. 지금 이제 중급의 자기소로 되어 있고 공납 백자들을 제작했다라고 얘기를 했기 때문에 그 자기들이 품질이 우수하다 이렇게 생각을 하실 수도 있긴 하지만, 실질적으로 이성계 발원 백자와 중급 자기소로 되어 있는 공안부나 예빈시나 장흥고나 이런 곳에 납품했던, 하려고 만들었던 백자편들을 보면 실제로 그렇게 품질이 우수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그 당시만 해도 이 백자를 제작했던 제작 기술력이 백자 중심으로 이게 도자 제작 기술 인력들이 발달한 게 아니라 청자였다가 분청이었다가 이게 넘어가는 어떤 그런 과도기이기 때문에, 흙을 우리가 채굴해서 바로 도자기를 빚을 수 있을 것 같지만, 그것을 쓸 수 있게 곱게 가공을 하고 흙 속에 있는 철분을 제거하고 이래야 되거든요. 근데 그 당시에 그런 공납 백자들을 만들었던 그 흙들은 단순하게 분쇄만 해서 자기를 제작했기 때문에 실제로 그렇게 흙이 도자기의 품질이 좋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이제 그 흙들을 어떻게 가공을 하느냐에 따라서 이제 품질이 달라지는데... 그래서 분원이 생기면서는 이게 백자를 만들기 위한 곳으로 이제 만들어지는 거잖아요.

■ 이석종 기자 : 광주 분원같은 경우에는요...

■ 정두섭 관장 : 예 광주 분원은.... 양구 백토가 광주 분원으로 옮겨가서는 곱게 분쇄하고 흙속에 있는 철분을 제거하고 이러면서는 당대의 최고의 백자를 만들기 위한 원료로 재생산을 하게 되는 겁니다.

■ 이석종 기자 : 양구 백토의 품질 자체가 완전 무결한 그런 상태는 아닌데, 어쨌든 이제 분원으로 가면서 그쪽에서 불순물을 정제하고 이러면서 좋은 백토가 됐다 그런 말씀이시네요?

■ 정두섭 관장 : 그럴 수도 있고요. 연말 선초의 백자는 단순하게 이제 자기만을 만들기 위해서 썼을 거로 보이고, 그 다음에 분원이 만들어지면서는 좀 더 고운 백색도가 좋은 그런 흙들을 찾았던 것 같아요.

■ 이석종 기자 : 예 알겠습니다. 오늘 시간은 벌써 시간이 거의 다 돼가지고요. 오늘 얘기는 여기서 마치도록 하고 내일 또 계속해서 이야기 나눠보도록 하겠습니다. 지금까지 양구백자박물관 정두섭 관장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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